78.4%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기회일까, 착시일까
한국 리테일 투자자의 스테이블코인 사용률이 말해주는 것과 말해주지 않는 것
한국의 스테이블코인 수요는 이미 크다. 그러나 그 수요 대부분은 원화 결제가 아니라 달러 유동성, 해외 거래소 접근, 글로벌 정산성에 가깝다. 이 때문에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기회는 USDT를 대체하는 데 있지 않다. 진짜 시장은 국내 규제권 안에서 원화로 표시된 자산을 온체인으로 결제하고 정산해야 하는 영역에서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두 개의 숫자가 충돌한다
한국의 크립토 활성 투자자 78.4%는 이미 스테이블코인을 보유하고 있다. 한 번이라도 써본 비율은 91%를 넘는다. 그런데 한국금융연구원은 국내 가맹점 90%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받더라도, 별도 혜택이 없으면 실제 결제 사용률이 최대 4.4%에 그칠 것으로 봤다. 한쪽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을 이미 쓰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결제 수요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이 충돌은 모순이 아니다. 두 숫자가 가리키는 시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공급 경쟁은 과열에 가깝다. 은행, 빅테크, 보험사, 한국은행까지 원화 기반 디지털 결제와 정산 실험에 뛰어들고 있다. 케이뱅크가 하나금융 컨소시엄 합류를 검토하고, 카카오페이는 은행권에 원화 코인 동맹을 제안했으며, 교보생명은 EQBR과 보험료 수납 및 지급을 원화 스테이블코인으로 처리하는 기술 검증을 마쳤다. 발행 주체가 되겠다는 신청서가 줄을 서는 모양새다. 그런데 정작 쓸 사람이 없다는 전망이 동시에 나온다. 문제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에 수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 시장에서 관측되는 스테이블코인 수요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겨냥할 수 있는 수요와 다르다는 점이다. 78.4%라는 사용률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기회처럼 보이지만, 그대로 읽으면 착시가 된다. 그 사용률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한국의 스테이블코인 수요는 하나가 아니다
블록미디어가 2026년 5월 활성 투자자 38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은 한국 이용자가 스테이블코인을 왜 쓰는지 비교적 선명하게 보여준다. 응답자의 78.4%가 현재 스테이블코인을 보유하고 있고, 보유 자산 2위가 이더리움이 아니라 테더(USDT, 16.7%)라는 점도 상징적이다.
핵심은 사용 목적이다. 가장 많이 꼽힌 용도는 해외 거래소 이용(50.1%)이었고, 가격 변동을 피하기 위한 대기 자금 보관(39.8%), 달러 가치 상승 기대(31.0%), 결제와 송금(30.7%)이 뒤를 이었다. 김치 프리미엄을 활용한 거래도 9.4%였다.
이 분포는 한 가지 정황을 시사한다. 적어도 현재 한국 이용자의 스테이블코인 사용은 국내 원화 결제보다 거래, 송금, 달러 유동성 접근에 가깝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스테이블코인을 드는 이유는 대체로 원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해외 거래소에 접근하고, 달러에 노출되고, 변동성을 피해 대기하기 위해서다.
스테이블코인 수요는 그래서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최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달러 접근과 글로벌 유동성 수요다. 다른 하나는 원화로 표시된 가치를 국내에서 정산하려는 수요다. 전자는 지금 압도적으로 크고, 후자는 아직 시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구조적으로 겨냥할 수 있는 것은 후자다.
폭발한 것은 ‘원화 결제’와 다른 수요다
수요의 방향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지표가 해외 송금이다. 김상훈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국내 5대 원화 거래소를 통한 해외 송금은 3년 사이 34조 원에서 163조5484억 원으로 380% 급증했다. 같은 기간 전통 은행의 해외 송금 증가율은 20%에 그쳤다. 가상자산을 통한 국경 간 자금 이동이 제도권 채널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380%를 원화 스테이블코인 수요의 근거로 읽으면 오독이다. 오히려 반대 방향의 증거다. 여기서 폭발하고 있는 것은 국내 원화 결제 수요가 아니라, 국경을 넘어 달러 기반 자산과 글로벌 유동성에 닿으려는 수요다. 이 수요는 원화로 표시된 가치를 국내에서 정산하려는 수요와 성격이 다르며,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잡기 어려운 영역이다.
보유 수요와 정산 수요를 구분하면 차이가 분명해진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사람들이 들고 있는 자산이다. 달러에 노출되고 싶고, 글로벌 유동성에 닿고 싶기 때문이다. 반면 원화는 들고 있을 이유가 약하다. 이미 은행 예금, CMA, 간편결제 잔액, 계좌 이체로 충분히 디지털화돼 있기 때문이다. 원화를 굳이 스테이블코인 형태로 오래 보유할 동기는 크지 않다.
4.4%는 실패가 아니라 성격이다
여기서 앞의 4.4%를 다시 봐야 한다. 이 숫자는 글로벌 시가총액 비중이 아니라, 가맹점에서의 결제 사용률 전망이다. 즉 리테일 결제라는 특정 용도에 대한 비관론이다. 그리고 리테일 결제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지만, 실은 가장 설득하기 어려운 시장이다.
한국은 결제가 이미 너무 잘 되는 나라다. 카드, 계좌 이체, 토스와 카카오페이와 네이버페이, 오픈뱅킹이 촘촘하게 깔려 있다. 이런 환경에서 일반 소비자가 굳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으로 커피값을 결제할 이유는 약하다. 리테일 결제가 가장 약한 시장이라는 점은 단정해도 좋다. 4.4%라는 전망은 이 현실을 반영한 것이지, 원화 스테이블코인 전체의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4.4%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성격을 알려주는 숫자로 읽는 편이 정확하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보유 자산이라면,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고회전 정산 수단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기업 간 결제나 자산 정산은 하루에도 여러 번 회전한다. 이 경우 발행 잔액이나 시가총액은 작아도 정산액은 클 수 있다. 시장을 발행 잔액으로만 보면 과소평가하거나 오해하기 쉽다.
가장 유력한 초기 시장: 원화 표시 자산의 온체인 정산
그렇다면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실제로 작동할 시장은 어디인가. 리테일 결제도, 해외 송금도 아니다. 가장 유력한 초기 후보는 토큰증권(STO)과 실물자산 토큰화(RWA)다.
이유는 단순하다. 원화로 표시된 토큰화 자산이 거래되기 시작하면, 자산 leg뿐 아니라 현금 leg도 함께 정산해야 한다. 이 현금 결제를 기존 은행망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 다만 온체인 자산과 동시에, 같은 환경에서 결제하려면 온체인 위의 원화 현금성 자산이 필요해진다. 이때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후보가 된다. 다만 이는 자동으로 주어지는 자리가 아니다. 같은 역할을 은행 예금토큰, 기관용 CBDC, 기존 계좌 기반 정산망이 맡을 수도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차별성은 토큰화 자산과 원화 결제를 같은 환경에서 원자적으로 처리할 필요가 있을 때 비로소 생긴다. 이 조건이 충족될 때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리테일 결제 수단이 아니라 제도권 토큰화 시장의 정산 인프라가 된다.
최근 움직임은 이 질문이 추상론이 아니라 실제 시장 설계 이슈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넥스트레이드와 한국거래소가 토큰화 증권 장외 거래소 본인가를 추진하고, 재정경제부가 토큰화 주식을 증권으로 보고 하반기 과세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 그 신호다. 기관 간 OTC 거래의 인도 대금 동시 결제(DVP)와 B2B 정산이 그다음 후보다. 교보생명의 보험 정산 같은 사례는 가능성은 있으나 보조적이다.
한국의 위치를 보면 이 시장의 시급성이 드러난다. 한국은 거래량 기준으로 글로벌 상위 시장이다. TRM랩스에 따르면 2026년 1분기 거래 규모는 690억 달러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였다. 그런데 정작 토큰화된 금융상품과 정산 인프라에서는 해외보다 늦다. 기초자산의 권리를 토큰화한 것은 아니지만,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한국 대표 자산을 추종하는 크립토 네이티브 거래 상품이 국내 제도권보다 글로벌 거래소에서 먼저 상품화되고 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문제는 이용자 수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원화 기반 온체인 정산 레일이 제도권 안에서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책이 헷갈리면 시장도 헷갈린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정책의 방향이 갈린다. 이것을 해외 스테이블코인의 대체재로 보면 오판이다. 달러 노출과 글로벌 유동성 수요는 구조적으로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몫이고, 원화 코인이 USDT를 대신할 길은 좁다. 반대로 이것을 리테일 결제 혁신으로만 보면 과대평가다. 한국의 결제 인프라는 이미 포화 상태이고, 4.4% 전망이 그 한계를 보여준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 토큰화 자산의 결제와 정산 인프라로 볼 때 비로소 현실적인 그림이 나온다. 그렇다면 정책이 던져야 할 질문도 달라진다. 누가 발행할 수 있는가. 준비 자산과 상환권은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해외 이전과 거래소 상장은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은행 예금토큰, 기관용 CBDC,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역할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규제는 단순한 장애물이 아니라, 시장의 형태 자체를 결정하는 설계 변수다.
마지막으로 측정의 문제가 남는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고회전 정산 수단이라면, 그 성패를 시가총액이나 발행 잔액으로 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정산액, 회전율, 기관 채택 수, 연결된 토큰화 자산 규모가 더 정확한 지표다.
한국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실패할 가능성은 수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잘못된 수요를 보고 시장을 설계할 때 커진다. 이미 존재하는 수요는 달러 접근과 글로벌 유동성에 가깝고, 앞으로 만들어야 할 시장은 원화 표시 자산의 제도권 정산에 가깝다. 이 둘을 구분하는 데서 모든 논의가 출발해야 한다.
데이터 출처: 코인니스(2026년 6월 한국 디지털자산 뉴스), 블록미디어 2026년 5월 한국 디지털자산 리테일 투자자 리포트(표본 388명), 한국금융연구원, TRM랩스, 김상훈 의원실. 본 글은 정보 제공 목적이며 투자 자문이 아니다.



